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문단 편집) === 사후의 복권 === || [[파일:USSR_stamp_Prokofiev_1981.png|width=200]] || || 1981년에 발매된 프로코피예프 기념우표 || 이처럼 프로코피예프는 말년에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으며 운명의 장난처럼 스탈린과 같은 날에 죽는 바람에 장례식마저 초라하게 치러야 했다. 하지만 사후 프로코피예프는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금새 복권되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57년의 레닌상 수상이다.[* 원래 이 상은 사망한 사람에게는 수여하지 않는데 프로코피에프는 예외적으로 수상자가 됐다.] 이처럼 소련 내에서 평가가 바뀐 것은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운동과 더불어 문화 예술 분야에서 각종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덕분인데, 한편으로는 쇼스타코비치나 [[하차투리안]]과 같이 암흑시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동료 작곡가들의 노력도 그의 음악이 다시 빛을 보는데 한 몫 했다. 소련 시절에는 주기적으로 프로코피예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으며 당시 소련 연방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국제공항은 1973년에 재공사를 마치고 개항하면서 '도네츠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다만 이 공항은 내전으로 파괴되어 버렸는데 자세한 것은 아래 후술.] 한편 공산국가와 서방국가의 냉전이 한창이었던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와 같이 서방에서 활약했던 음악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음악적 평가가 높지 않았지만,[* 현재도 프로코피예프는 연주 빈도나 대중적 위상에 비해 음악학계에서의 평가가 다소 미묘한 편이다.] 양쪽 진영 사이에 해빙기가 찾아오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평가가 다시 높아졌다. 그리고 21세기 현재,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현대음악 중에 가장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로 정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